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타르 3세 (문단 편집) === 힘을 키우다 === 1075년 6월에 [[유복자]]로 태어났다. 로타르의 아버지인 주플린부르크의 게브하르트는 [[하인리히 4세]] 황제에 대항하는 전투에서 죽었다. 토지를 구매하거나 유산을 얻고 작센 도처에 결혼 [[동맹]]을 맺은 후에 로타르 3세는 빌룽, 노르트하임, 부르노넨 가문의 영지를 얻었고 북쪽 공작령의 우세한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. [[하인리히 5세]]가 아버지 [[하인리히 4세]]와 싸우기 위해 그의 도움을 받는 조건으로 1106년에 [[작센]] [[공작(작위)|공작]]이 되었다. 작위가 올라서 대담해진 로타르 3세는 [[하인리히 5세]]의 공작들에 대한 새로운 세금의 시행에 반대해 반란을 일으켰고 서임권 투쟁 동안 하인리히가 작센에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했다. 1115년에 벨페숄츠 전투에서 그의 군대는 황제의 군대를 이겼다. 1125년에 [[하인리히 5세]]가 죽자 로타르는 [[마인츠]] 대주교 입장에서 완벽한 후계자이며 제국의 수반으로 보였다. 로타르는 광대한 토지를 가진 지주로서 힘이 강했지만 나이가 많고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후계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. 그래서 [[호엔슈타우펜 가문]]의 당주인 [[슈바벤]] [[공작(작위)|공작]] 프리드리히 2세와 논쟁을 벌인 후에 힘겹게 [[독일 왕]]으로 선출되었다. 그의 선출은 세습되는 승계의 개념으로부터 벗어났다는 것에서 주목을 받았다. 제국과 교황 사이의 복잡한 투쟁에 관해 잘 몰랐던 로타르는 [[교황]]의 확인 절차를 통해 나중에 로마에서 해석된 상징적인 행동에 대해 동의했다. 같은 해에 일어난 보헤미아와의 [[전쟁]]은 패배로 끝났다. 보헤미아 인들에 의해 투옥된 사람들 중에는 미래에 [[브란덴부르크]] [[변경백]]이 되는 알브레히트가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